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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시대의 민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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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좀지나가자 2023. 11. 7.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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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모하는 고대생들 다 때려죽여라!"

김좌진장군과 전혀 상관없는 김을동의 애비가 정치깡패로 나옵니다.

정치깡패들이 판을 쳤던 이승만 시대의 민낯

시위를 끝내고 학교로 돌아가던 고려대 학생 4명이 종로4가 천일백화점 앞에서 정치깡패들에게 피습당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다. 

"고대생들 다 때려죽여라~", "새끼들~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1960년 4월 18일 밤 7시 20분경 서울청계천 4가 천일백화점 앞.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를 끝내고 학교로 돌아오던 고려대생들이 청계천4가 천일백화점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갑자기 도로 옆 골목 안에서 괴한들이 뛰어나와 행렬을 습격했다. 100여 명의 괴한들은 쇠망치, 몽둥이, 벽돌 등 각종 흉기로 닥치는 대로 학생들을 두둘겨 패기 시작했다.

선두에 있던 학생 수십 명이 순식간에 쓰러졌다. 10분도 채 안되는 사이에 학생 200여 명이 쓰러졌다. 중상자 20여 명은 병원으로 옮겨졌고 나머지 학생들은 학교로 갔다가 밤 8시 40분경 해산했다.

괴한들은 '반공청년단 종로구단 동대문 특별단부' 소속 조직폭력배들이었다. 반공청년단 종로구 단장 임화수는 이날 낮 고려대생들이 데모에 나섰다는 소식을 듣고 단원들을 중앙청 옆 반공회관에 집결시켰다. 폭력배들은 천일백화점 부근에 대기하고 있다가 귀교길의 학생들을 습격한 것이다.

다음날 조간신문에 그 장면을 사진과 함께 크게 보도되었다. 이 사건은 민심을 크게 자극해 4.19혁명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동대문 경찰서는 폭력배 8명을 연행하였으나 경무대 경호책임자 곽영주의 지시로 이들을 곧 석방했다. 이 폭력배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야당집회에 파나마 모자를 쓴 깡패들이 각목을 들고 난입해 집회를 방해하고 있다.
정치깡패가 언론에 등장한 것은 1957년 5월 25일 깡패들이 야당집회를 방해하는 사건이 발생할 때였다. 이날 야당인사들로 구성된 '국민주권옹호투쟁위원회'가 주최하는 시국강연회가 장충단공원에서 열렸다.

20여만 명의 군중이 입추의 여지없이 광장을 메운 가운데 민주당 대표최고위원 조병옥이 지난 9년간의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부패 실정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순간 청중 속 곳곳에서 파나마 모자에 검은 안경을 쓴 청년들이 "죽여라!"하고 외치면서 연단을 향하여 돌과 유리병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어 여기저기서 각목을 든 괴한 10여 명이 연단 위로 뛰어 올라와 책상을 뒤엎고 식순을 찟어버리는 등 난동을 부렸다. 괴한 중 1명은 연단 옆 마이크 조정기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연사로 나선 조병옥, 장택상, 전진한씨 등은 연단 아래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경호를 맡은 같은 깡패 출신 김두한 의원만이 괴한들과 몸싸움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이었다. 경찰은 괴한들이 연단을 완전히 파괴하고 도망친 지 한참 뒤에야 나타났다. 이날 난동의 배후에는 이정재가 있었고, 현장 책임자는 유지광이었다. 동원된 깡패들에게는 자유당 쪽에서 일당으로 밀가루 15만 포대를 줬다고 한다.


이승만 치하에서 안하무인격으로 주먹을 휘두르던 정치깡패의 원조 이정재. 5.16쿠데타 직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주먹들의 활동무대는 도시, 그중에서도 상업지역이다. 그래서 ‘주먹의 역사는 상업의 역사’란 말까지 나왔다. 일제강점기의 경성은 크게 봐서 조선인 상점이 밀집한 종로 상권과 일본인이 모여 있는 명동 상권으로 나눠져 있었다.

명동을 장악한 주먹은 하야시, 선우영빈이란 이름을 가진 조선인이었다. 그는 부모를 따라 일본에 간 뒤 거물 정치인이자 최대 야쿠자 조직인 현양사의 보스 도오야마 미쓰르의 휘하에서 큰 인물이다. 이런 빽을 가진 하야시는 조선내 일본 야쿠자 조직의 우두머리로 파견돼 명동을 장악했다.

종로의 경우 절대 강자가 없었다. ‘구마적’이니 ‘신마적’이니 ‘쌍칼’이니 몇 명이 군웅할거를 하고 있었다. 하야시에 비하면 자금력은 물론 조직력, 동원력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 동네 건달 수준이었다.


이제는 전설로 남은 ‘장군의 아들’ 김두한
그러나 이 종로거리에도 드디어 ‘큰형님’이 나타났다. 바로 ‘장군의 아들’ 김두한이다. 그는 종로2가에 있는 극장 ‘우미관’을 기반으로 빠르게 종로를 평정한다. 이어 여세를 몰아 마포와 영등포, 왕십리 등 장안의 주먹을 장악하고 드디어 조선팔도를 아우르는 최초의 ‘전국구’로 등극했다.

해방이 되고 일본 깡패 조직까지 떠나가자 ‘김두한의 시대’가 열렸다. 김두한의 조직은 이승만과 경찰의 보호 아래 곳곳에서 ‘백색테러’를 저질렀다. 이들 깡패들은 이북에서 내려온 서북청년단과 경쟁적으로 파업현장이나 좌익이 주최하는 집회를 찾아다니며 폭력을 행사했다. 경찰이 할 수 없는 ‘비합법’의 공간에서 무자비한 테러를 일삼은 것이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큰형님’ 김두한이 정계로 떠나자, 그 공백을 채운 인물이 바로 이정재다. 그는 동대문시장을 근거지로 세력을 키우다 자유당의 실력자 이기붕에게 접근해 정치권과 연을 맺으며 힘을 불려나갔다.

부산정치파동 당시 ‘땃벌떼’니 ‘백골단’이니 ‘민중자결단’이니 정체불명의 주먹들을 동원해 재미를 봤던 자유당이 마다할 리 없었다. 이정재는 시키는대로 주먹을 행사하고, 자유당은 권력과 돈으로 뒤를 봐줬다.

이정재가 부하 50여 명을 이끌고 국회의사당 방청석에서 검은 양복과 선글라스를 낀 채 한 발을 걸치고 있다가, 어느 야당 의원이 이승만 정권을 비난하면 부하들이 “너 이 자식아~ 죽을 줄 알아”라고 외치며 주먹을 휘두르기도 했다. 맘에 안드는 국회의원이 있으면 대거 쫒아가는 바람에 의원이 국회 바깥으로 도망가는 일도 있었다.


4.19혁명 당시 정치깡패 이정재의 집이 성난 시민들에 의해 불타고 있다.
주먹세계를 평정하자 이정재는 ‘형님’ 김두한에 이어 정계진출을 꾀했다. 이게 그의 실수였다. 이정재는 고향 경기도 이천에 열심히 공을 들였다. 자유당 이천 지구당위원장을 맡아 고향과 관련된 민원을 거침없이 해결해주면서 표밭을 일궜다.

이미 이천에서 13대를 살아온 토박이 집안이고, 이걸 밑천으로 이천에서 벌어지는 대소사에 참석해 자리를 빛내주거나 금일봉을 전달했다. 통행금지가 있던 그 당시에도 이천쌀만은 이정재 덕분에 통금과 상관없이 서울로 들어올 수 있었다.

지나가던 행인이 주먹들에게 봉변을 당할 때 “나~ 이천 출신이야. 왜 이래?”하면 만사가 해결됐다고 한다. 그러나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렸다. 자신이 극진히 모시던 자유당의 실력자 이기붕이 이천에 출마한다는 것이다. 이기붕은 극심한 반 자유당 여론에다 여촌야도 현상으로 국회의원 당선을 자신할 수 없자 자신의 선산이 있는 이천을 강탈한 것이다. 이정재는 크게 반발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일로 이기붕과 이정재 사이가 뒤틀어졌다. 자유당은 깡패조직 오야붕의 대타로 종로4가 평화극장 사장 임화수를 선택했다.


반공예술인단을 만들어 연예계를 갖고 놀았던 임화수.
1959년 3월 19일 자유당은 이승만의 영구집권을 뒷받침하기 위해 연예인 동원을 목적으로 임화수를 단장으로 한 ‘반공예술인단’을 만들었다. 이 단체가 임화수가 설치고 다니는 무기였다.

그는 자유당의 모든 선거운동에 연예인을 투입했다. 임화수는 이기붕 대신 최인규 경무대 경호책임자에게 줄을 댔다. 1960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임화수는 정치적 야심을 품고, 대작영화를 제작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청년시절 독립투쟁을 담은 정치드라마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이라는 작품이다. 제작비를 국고에서 부정 대출해 만든 이 영화가 나온 이후 임화수의 권력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감독·배우 할 것 없이 임화수 앞에서 꼼짝을 못했다. 요청을 거절하면 희극배우 김희갑처럼 갈빗대가 부러질 만큼 얻어터지고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일설에 따르면 임화수는 이승만 대통령만 만나면 아버님이라고 부르며 눈물을 쏟을 정도로 밀착관계였다고 한다. 임화수는 여러 가지 감투를 한꺼번에 썼다. 반공예술단장, 평화극장 사장, 전국극장문화단체연합회 부회장, 한국영화제 작가협회 부회장, 한국연예주식회사 사장, 무대예술원 부회장, 극장협회 부회장 등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그가 얼마나 기세등등했는가 하면, 치안본부 특정과(지금의 청와대 ‘사직동팀’)에 소환돼 나갔다가 오히려 책상을 치면서 호통을 치고 나왔다고 한다.

한번은 자신이 주최한 반공대회에서 도청을 하다 걸린 특정과 형사에게 강펀치를 날려 기절을 시켰다. 주변 사람들은 호리호리한 임화수가 몇 번 주먹을 날리자 덩치 큰 형사가 그대로 잠들어 버리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이승만 대통령의 총애를 받는 경무대 경호책임자 곽영주 경무관과 ‘형님~아우~’하는 사이였기에 그런 권력행사가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게 일장춘몽이었다.


당시 대한민국 최고의 권력자 가족들. 왼쪽부터 이승만 대통령, 프란체스카 여사, 이승만의 양자 이강석, 강석의 아버지 이기붕, 어머니 박마리아.
4.19혁명에 이어 5.16쿠데타에 이르기까지 1년여 동안 대한민국은 혼란에 휩싸였다. 이승만의 하야와 하와이로의 도주에 이어 이기붕 가족의 집단 자살이란 참극이 벌어졌다.

제2공화국 장면 정권이 자리잡기도 전에 박정희 소장이 주도한 5.16쿠데타가 발생했다. 군사정권은 민심을 잡기 위해 대대적인 깡패 소탕에 나섰다.


이정재를 선두로 거리에 끌려나온 정치깡패들. 죄다 교도소 아니면 건설현장에 끌려간다.
1962년 5월 21일 오후 희안한 구경거리가 서울시내에서 벌어졌다. 군사정권은 자유당 시절 정치깡패 두목인 이정재를 비롯하여 200여명의 깡패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이들은 ‘나는 깡패입니다', '국민의 심판을 받겠습니다', '깡패 생활을 청산하고 바른 생활을 하겠습니다', '우리는 젊은 몸과 마음을 국가에 헌신하겠습니다' 등이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덕수궁을 출발해 시내 중심가를 행진했다. 이들에겐 ‘용갈파’, ‘개고기’, ‘까게’, ‘돼지’ 등과 같은 이름표도 붙어 있었다.

이정재는 4·19 이후 법에 따라 8개월의 징역살이 끝에 61년 2월 초에 석방되었는데 다시 시범 케이스로 걸려든 것이었다. 이정재와 임화수, 그리고 이들을 뒤에서 돌보던 곽영주는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 사라진 줄 알았던 정치깡패들, 전두환 정부에서 부활하다


1987년 4월 4일 신한민주당 당기위원회가 무산된 뒤 정치깡패 용팔이가 거칠게 당원들을 위협하고 있다.
전두환 정권 시절, 김영삼과 김대중 등 ‘차세대 야당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70여 명의 신한민주당 소속 의원들이 집단 탈당한 후 ‘통일민주당’이라는 새로운 정당을 창당한다고 선언했다. 이른바 ‘선명야당’의 출범이었다.

이후 4월 20일부터 24일까지 서울 중앙당과 전국 지부에서 창당대회를 열었다. 그러나 대회장마다 각목과 쇠파이프 등 흉기로 무장한 폭력배들이 난입했다. 이들은 기물을 부수고 참석자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등 난동을 부리며 창당을 방해하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의 출동은 이승만 시대와 똑같이 난동이 끝나서야 이루어졌다.

현장에는 부상자와 파괴된 기물, 충격과 공포에 빠진 목격자들만 남았다. 거듭된 수사 요청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당 내부 문제이므로 당에서 알아서 처리하라”는 답만 줄 뿐이었다. ‘통일민주당’은 이런 조직적 폭력 난동에도 불구하고, 5월 1일에 창당한다.


1987년 4월 24일 ‘괴청년’으로 불린 폭력배 조직원 100여 명이 통일민주당 서울 관악지구당을 습격했다.
전두환 독재정권이 물러나자 노태우 정부 시절에 이 창당 방해 사건에 대한 수사가 착수되었다. 경찰은 난동을 주도한 콧수염을 단 ‘용팔이’라는 조직폭력배 두목 김용남과 그에게 폭력을 사주한 신한민주당 이선준 청년부장을 검거했다. 그리고는 이 사건이 신한민주당의 이택희·이택돈 의원이 주도하고 기획한 사건이라고 발표하고 서둘러 사건을 종결지었다.

다시 정권이 바뀌어 이 사건의 최대 피해자였던 김영삼 대통령이 재수사를 지시했다. 조사 결과는 놀라웠다. 최정예 국가 정보기관인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지금의 국가정보원) 장세동 부장이 야당인 신한민주당의 이택희·이택돈 의원에게 당시로서는 거액인 5억원을 주고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를 위한 폭력 청부를 하라고 지시한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장세동 전 안기부장은 “내가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는 말을 남기고 구속되었다. 정말 무서운 역사의 반복이다. 이기붕-이정재로 이어진 깡패사건이 세월이 지나 장세동-용팔이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용팔이' 김용남씨는 2009년에 낸 <나는 매일 눈물로 성경을 쓴다> 라는 책에서 당시 폭력을 사주한 사람들의 "어려울 때 나라를 구할 사람은 김 동지밖에 없다. 나중에 국회의원 자리도 보장하겠다"는 감언이설에 속아 앞장섰다고 고백했다. 이어 "나는 제2의 김두한이 될 것이라는 착각에 빠졌다"고 회고했다.

주먹을 쓰고 싸우고, 폭력을 이용해 약한 사람을 괴롭히고, 돈을 갈취하는 데는 이력이 났지만, 정치적 술수와 계산을 모르는 김용남은 영웅 심리와 정치인이 자신을 인정해줬다는 우쭐함에 큰 사고를 친 것이다. 돌아온 댓가는 끝없는 교도소 생활이었다.

‘용팔이 사건’을 마지막으로 ‘정치깡패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렇다고 주먹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들도 시대에 맞춰 진화하고 있다. 수사기관은 위장으로 간주하겠지만, 다들 사업가의 길을 걷고 있다. 사업과 조직이 공존하는 것이다. 사업 분야도 다양하고 사회봉사활동까지 한다. 일본의 독도 침탈 기도에 항거해서 손가락을 자르기도 한다.

서로 가능하면 싸우지 않는다. 다들 이러저러한 세월을 겪어봤기 때문이다. 이들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 우리 사회의 ‘하수구’일 뿐이다. 정치깡패사건을 아무리 들여다 봐도 결론은 똑같다. 정치인들이 무식한 깡패를 갖고 논 것이다. 아무리 주먹이 세도 정치인에게는 그냥 ‘하수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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