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1885년 영국의 거문도 무력점령과 부패무능 이씨조선

역사는삶의보고다

by 좀지나가자 2021. 10. 25. 01:43

본문

728x90

부패와 무능의 이성계 조선은 거문도를 열강이 점령해도 두 손 놓고 있었다.

 

글: 전집현(역사연구가)

#여수#제주도 사이의 #거문도 , #군사요충지 로 열강이 눈독

1840년 태평양 출구 찾던 #러시아함대 가 상선과 처음 정박

#영국군 1845년 발견 뒤 1885년 군함6척 상선2척으로 #무력점령

포대와 병영 구축, 홍콩과 해저케이블 연결하여 #섬요새화

거문도 주민에 일자리 보수지급 및 문화생활 해결 유대 돈독

거문도 무당을 짝사랑하다 죽은 영국군 수병이 이야기도 전해

영국군 철수하자,

부패 정권에 수탈만 당하던 주민들, 눈물로 가지 말라고 호소

▲ 영국해군은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하여 불법으로 우리나라 거문도를 점령하였다. 사진은 거문도를 점령한 영국 수병들. 영국군은 거문도를 해밀턴 항구(Port Hamilton)라고 제멋대로 이름 지었다(편집인 주)

<구한말 거문도를 무력으로 점령 (1885~87)한 영국해군, 그들은 섬 주민들과 우호적으로 잘 지냈다>

1. 거문도는 여수시 삼산면 소속

거문도(巨文島)는 전라남도 여수와 제주도 사이에 있는 섬이다. #고도 (古島)· #동도 (東島)· #서도 (西島)의 세 섬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 고도만을 거문도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금 3개의 섬은 다리로 연결돼 한 몸이나 다름없다.

3개의 섬으로 둘러싸인 #거문도내항 바다가 마치 호수처럼 잔잔하고 수심 또한 깊어 #대형군함을정박시킬수있는좋은조건 을 갖추고 있다.

2. 거문도에 들른 러시아 함대

거문도는 중국과 일본을 오가는 항로의 중간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구 러시아는 거문도가 러시아 동양 함대의 길목에 있는 항로상 요충지이며, #태평양출구구실 을 한다고 ‘ #동양의지브롤터 (Gibralter)’라고도 불렀다.

1840년대부터 러시아 상선과 함대가 거문도에 머물렀다. 1854년 러시아 함대가 거문도에 기항했을 때는 마을 유지들을 함상으로 초대해 차 대접과 피아노 연주를 한 적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3. 1885년 영국이 무력점령

1885년(고종 22) 4월 15일 영국은 군함 6척, 상선 2척으로 거문도를 무력 점령했다. 점령 기간은 1887년 2월 27일까지 2년간에 달한다.

포트 해밀턴(Port ㏊milton)이란 지명을 붙였는데, 1845년 거문도를 처음 ‘발견’했다는 영국 해군 함대가 해군성 차관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당시 러시아는 영국과 적대적인 관계였는데, 러시아는 부동항(不凍港)을 확보하기 위해 조선에 대한 진출을 추진했다.

영국 해군은 이러한 러시아의 남하 정책에 맞서기 위해서 거문도를 점령하여 영국 함대의 전진기지로 삼으려 하였다. 구체적으로 블라디보스토크의 러시아 동양 함대를 견제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렇게 거문도를 영국군이 점령하자 러시아가 조선을 넘보던 계획에 제동이 걸리고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강화했다.

청나라와 러시아, 영국 등 3개국이 상호교섭 결과, 타국이 거문도에 진입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영국군이 1887년 거문도에서 철수했다.

4. 거문도 점령 후 섬 전체를 요새화

거문도를 점령한 영국군은 영국기를 게양하고 포대와 병영을 쌓는 등 섬 전체를 요새화했다.

제일 먼저 #거문도와상하이사이에해저케이블을부설 했다. 섬 주위에는 #수뢰 를 부설하고 급수로 가설하였다. 또한 군함 발전기를 통해 전기를 들여와 전구를 켰다.

거문도 주둔 영국 해군은 때에 따라 200∼300명에서 700∼800명으로 증가하였고 정박한 군함도 5∼6척에서 10척까지 증가하였다.

5. 홍콩처럼 될 뻔한 거문도

영국 정부는 무력점령 이틀 뒤인 4월 17일 청나라와 일본에 거문도점령 사실을 통고하였으나, 조선 정부에는 주청 영국 공사관을 통해 5월 20일에야 통고하였다.

영국은 애초 청나라와 교섭하여 거문도를 홍콩처럼 #영국의영구조차지 로 만들 계획으로 #거문도협정안 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조선 문제에 결정적인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던 이홍장(李鴻章)은 거문도사건으로 인해 러시아와 일본이 제각기 조선 내의 영토 점령을 요구하고 나설 때 국제분쟁으로 커질 것을 우려, 영국의 거문도 조차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고 나섰다.

거문도사건은 영국과 러시아의 패권대립에서 일어난 사건이지만 조선은 이 사건의 해결 과정에서 아무런 존재감이 없었다.

2년간 점령이 지속하면서 하마터면 거문도가 홍콩처럼 영국의 조차지가 될 뻔했다.

6. 거문도 주민과 우호적 관계

당시 거문도에 주둔한 영국군은 비교적 호의적이었으며 주민들과도 잘 지냈다고 전해진다.

거문도 주민들은 영국군의 병영막사 건립과 항만조성 토목공사에 자발적으로 참여해 임금을 받았다. 또한 토지를 대여하면서 사용료도 받았다.

영국 해군이 운영하는 목장에 섬 주민들이 고용되었다. 거문도 주민들은 영국군들을 통해 서양 문화와 스포츠, 의술 등을 접할 기회를 얻었다.

섬에 한국 최초의 테니스장과 당구장이 만들어졌다. 거문도에는 당구 1000을 치는 할머니가 있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떠돈다.

그리고 해변에는 서양 깡통이 굴러다녔다. 궐련(담배)도 흔해져 누구나 입에 물고 다녔을 정도였다.

현지 여자(무당)를 짝사랑하다 죽은 영국 수병이 있어서 젊은 여자가 빠져 죽으면 영국인 귀신이 잡아간 것이라는 괴담도 전해진다.

7. 영국 해군이 철군하던 날, 그리고 그들의 흔적

#조선왕조에서강제부역과수탈을당해왔던거문도주민들 은 영국 해군 철군 당시 눈물을 흘리며 가지 말라고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영국 해군이 철수하면서 그들이 거문도에 설치했던 모든 시설물을 철거해 홍콩으로 가지고 떠났다.

영국군이 세웠던 막사 자리에는 거문초등학교가 자리 잡고 있었으나 최근 폐교되었다.

점령 도중 사고와 질병으로 인해 죽은 수병 9명의 묘지가 있었지만, 지금은 두기만이 남아 있다.

전집현 mukto@naver.com

저작권자 ©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728x90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