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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숨기고 싶어하는 전쟁1

역사는삶의보고다

by 좀지나가자 2022. 5. 28.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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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에 일어난 미국-필리핀전쟁은 #아시아에서미국과싸운최초의민족해방투쟁 이란 의미와 제국주의 미국의 본모습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다. 하지만 이 전쟁은 미국의 교과서는 말할 것 없고 필리핀에서도 그 실상이 왜곡되어 있다. 필리핀의 근세사는 한국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필리핀의 독립전쟁사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작업은 우리에게도 대단히 중요하다.

미국-필리핀전쟁의 배경

필리핀의 수도는 마닐라(Manila)이며 언어는 타갈로그어,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인구는 2010년 기준 97,976,603명이고 300,000㎢의 면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종족은 말레이인 96%, 기타 인도네시아인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 종교는 가톨릭(83%)이다. 그 외의 종교는 개신교 9%, 회교 5%의 분포를 보이고 있다.

필리핀의 역사를 간략히 간추려 보자. 필리핀이 서구인들에게 노출되기 시작한 시기는 1521년 스페인의 마젤란이 필리핀에 도착하고 부터였다. 그리고 8년 후인 1529년 스페인은 사라고사 조약에 의해 포르투갈로부터 필리핀의 영유를 인정받는다. 본격적인 식민지 시기는 1565년 세부 섬에 식민지 기지를 건설하고 1571년 마닐라 시가 설치되면서 시작된다.

필리핀은 긴 세월 식민통치를 받은 때문인지 식민지 이전 역사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다. 900년 경 마닐라 만을 중심으로 중국 해상무역을 통해 번성했던 ‘톤도 왕국’이 어느 정도 알려진 정도다. 스페인은 당초 토르데실라스 협약에 저촉하지 않고 향신료가 생산되는 곳을 찾아 필리핀을 정복했지만, 예상한 향료가 발견되지 않자 필리핀을 교역중계지로 취급하였다. 1573년 중국 교역품이 처음으로 멕시코까지 수출되는 갈레온 무역이 시작되었다. 갈레온 무역은 1년에 1척의 갈레온이 계절풍을 이용하여 마닐라에서 멕시코 아카풀코까지 태평양을 횡단하는 것이다.

아카풀코에서 카리브해 연안의 베라크루즈까지 무역중개로 아시아 물품을 유럽까지 보냈다. 또 1581년과 1582년에는 마닐라에서 남미 페루 부왕령의 칼라오까지 갈레온이 보내졌지만, 페루와 마닐라의 무역은 1631년에 금지되었다.

#갈레온무역 에서 스페인의 결제는 멕시코 은행을 통해 이루어졌다. 필리핀은 스페인 함대가 미군에 격퇴된 직후인 1898년 6월에 독립을 선언하기까지 333년 동안 스페인의 식민 통치를 받았다. 스페인은 이 기간 동안 34회 이상 필리핀인들의 반란을 진압해야 했는데 자세한 과정은 생략한다.

미-스페인전쟁과 미-필리핀전쟁

필리핀인들이 자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던 1898년 미국과 스페인 간에 갑자기 전쟁이 일어난다. 미-스페인전쟁(Spanish–American War, 1898)과 미-필리핀전쟁(War of Independence, Philippine–American War, 1899-1902), 이 두 전쟁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함께 다룰 수밖에 없다.

19세기 마지막 분기에서, 미국은 강력한 산업 국가가 되었다. 대기업과 큰 사업체가 경제계와 정부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미국이 자랑하는 "From Coast to Coast" 즉 대서양 해안에서 시작하여 태평양 해안까지 미 대륙 전부를 차지하지만, 미국의 대형 자본가들은 새로운 시장과 자본의 수출을 위해 해외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 타켓은 점차 쇠락해가고 있던 스페인 통치하의 식민지들이었다.

1898년 미국은 스페인이 쿠바를 지나치게 억압한다며 시비를 걸었다. 그러나 막상 전쟁을 할 명분이 없었다. 그러던 중 아바나(하바나)항에 정박 중이던 미 해군함 메인호(USS Maine)가 원인 불명의 폭발로 침몰하였다. 이 사고로 260여명의 해군들이 사망했다. 이를 계기로 미국의 선정적인 언론들은 “메인호를 기억하자”(Remember the Maine!)면서 전쟁을 부추겼다. 미-스페인전쟁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 폭발을 조사한 잠수부들의 증언에 따르면 선체가 안에서 밖으로 터져있었다고 하니 단순 사고 또는 자작극이었다.

이 사건이 자작극(false flag operation)이었음을 입증하는 발언이 있다. 1897년 당시 맥킨리 대통령이 시어도어 루즈벨트를 해군차관으로 임명했을 때, 루즈벨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어떤 전쟁이든 환영한다. 우리나라는 전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루즈벨트가 이 말을 한 1년 후 우연의 일치인지 메인 호 사건이 터진다. 루즈벨트는 1898년 2월, 함대를 홍콩으로 발진시켜 스페인에 항쟁 중인 필리핀을 접수하기 위한 준비를 하라고 조지 듀이(George Dewey) 제독에게 지시한 바도 있다.

이 전쟁에서 미국은 승리하였다. 그 결과 스페인이 점령하고 있던 카리브 해 연안의 푸에르토리코, 태평양의 괌, 그리고 필리핀을 미국이 차지한다. 이 과정에서 필리핀은 스페인과의 독립전쟁을 미국과의 독립전쟁으로 전환하였다. “스페인의 왕 필립 2세 (Philip II 1527–1598)의 땅”이라는 뜻의 필리핀이라는 나라 이름처럼 필리핀은 비극의 땅이다. 스페인은 초대총독 미구엘 로페즈(Miguel López de Legazpi 1565-1572)로부터 마지막 총독 니콜라스 자라밀로(General Nicolas Jaramillo 1899-1898)까지 118명의 총독이 혹독한 식민지 정책을 펼쳤다. 필리핀이 보다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한 것은 스페인의 식민통치 말기 무렵인 19세기 중반부터다.

16세기 말 식민지로 전락해 3세기가 넘도록 스페인의 지배를 받아오던 필리핀, 그러나 19세기에 이르자 필리핀인들은 자신들이 같은 민족이라는 사실과 민족주의에 점차 눈을 뜨게 되었고, 식민통치 하에서 점차적으로 개혁운동을 전개해 나간다.

1872년 2월 20일 필리핀 독립군들에 의해 카비테 스페인 군 무기고 습격과 스페인장교 살해사건이 일어나자 스페인당국은 필리핀 신부 3명(자신토 사모라, 호세 불고스, 마리아노 고메스)을 포함하여 수많은 필리핀 애국지사를 처형한다. 그 이후 스페인 정부의 지속적인 탄압으로 많은 애국지사들이 해외로 망명했다.

1872년, 20∼30대 초반의 부유하고 훌륭한 가문의 지식인 층들이 평화롭게 전개한 개혁운동(Propaganda Movement)은 책, 언론기사, 팸플릿, 대중연설 등을 통해 스페인 정부에 압력을 가한다. 그 중 1889년 2월 15일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창간된 “라 솔리다리다드(La Solidaridad)”가 스페인 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했으나, 1895년 11월 15일 자금부족으로 폐간되었다. 이러한 비폭력 저항운동의 중심에 호세 리살(Jose Rizal 1861-96)이 있었다.

호세 리살의 비폭력저항운동

#호세리살 은 1861년 필리핀 라구나주 칼람바의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테네오데마닐라 대학, 산토토마스 대학 수학 후, 1882년 유학하여 스페인 마드리드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리살은 전공 외에도 건축과 경제, 인류학, 사회학, 무술과 펜싱, 사격에도 조예가 깊었고 11개 언어를 구사한 재능 많은 시인이자 특파원, 소설가였다.

그는 스페인 식민통치하에서도 얼마든지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호세 리살은 스페인의 심장을 향해 펜대를 겨누었다. 그가 필리핀의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892년 유럽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부터였다.

그는 마닐라에서 필리핀민족동맹(Liga Filipina)을 결성, 비폭력저항운동을 전개했다. 1886년 타갈로그어로 발표된 첫 번째 소설『나에게 손대지 말라 Noli me tangere』등 수많은 작품은 필리핀 민중들에게 자주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특히 스페인 관료들과 신부들의 직권남용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Noli Me Tangere와 El Filibusterismo'는 1896년에 일어난 필리핀 혁명의 도화선 역할을 했다. 처형 전날, 산티아고 요새에 갇혀 있을 때 지은 리살의 “마지막 이별” (Útimo adiós)은 19세기 스페인 시의 걸작으로 꼽힌다.

1892년 7월 7일, 보니파쇼와 그의 친구들에 의해 마닐라 톤도에 위치한 데오다토 아렐라노의 집에서 카티푸난이라는 비밀결사조직을 결성하면서 필리핀의 독립을 위한 무장혁명이 시작된다. 회원등급을 카티폰(핵심인물로 조직), 까왈, 바야니(애국자)로 나누어 관리했고, 조직에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가담했다.

1895년 4월 10일, 보니파쇼와 참모들은 몬탈반의 동굴에서 혁명의지를 다짐하며, 동굴벽에 “필리핀 독립만세”라는 구호와 자신들의 이름을 새겨 넣은 ‘몬탈반의 함성'을 실시했다.

보니파쇼 등 혁명지도자들은 일본과 호세 리살에게 카티푸난의 혁명 활동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재력가, 지식인 계층에게서 외면당한 카티푸난은 이에 굴하지 않고 사각의 빨간 바탕위에 ‘K.K.K'라고 적힌 카티푸난 혁명기를 만들어 투쟁했으며 농부들과 마닐라 지역의 노동자들도 카티푸난의 혁명 활동에 대거 가담하게 된다.

1896년 8월 19일, 테오도로 파티노의 밀고로 스페인당국은 수백 명의 카티푸난 조직원들과 애국자들을 투옥했다. 1896년 8월 30일, 보니파쇼와 800여명의 혁명군은 산후안 델몬테의 스페인 군 무기고를 최초로 습격한다. 비록 열악한 무기와 전투경험의 부족으로 패하였지만 그들의 반 스페인 투쟁은 필리핀 군도 전역을 혁명의 열기로 들끓게 만들었다.

리살은 카티푸난과 무관했고 폭동에 참가하지도 않았으나 체포되었다. 리살의 노선은 철저히 비폭력 평화적인 투쟁이었으나 독립운동의 싹이 커질 것을 우려한 스페인 식민당국은 카티푸난 폭동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체포해 공개 처형했다. 그의 나이 35세일 때다.

그가 처형당한 12월 30일은 “호세 리살의 날”로 기념되고 있으며 필리핀 수도 마닐라의 로하스 거리에는 그를 추모해 세운 리살 공원과 그의 동상이 있다. 호세 리살의 희생으로 필리핀인들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는 것 말고는 어떤 대안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기날도의 무력항쟁

필리핀 사람들은 스페인-미국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자 오랜 식민지에서 해방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또 다시 미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1898년부터 1902년까지 계속된 독립전쟁에서 수많은 군인, 시민들이 직접 혹 간접적으로 사망하였다. 이 무렵 등장한 인물이 필리핀 건국의 영웅으로 받들어지고 있는 #에밀리오아기날도 ( #EmilioAguinaldo , 1869-1964)이다.

아기날도는 1895년 카비테 시장으로 선출됨과 동시에 카티푸난 조직에 참여했다. 그는 국가적 영웅 호세 리살의 처형에 대응하여 다른 반란들을 이끌었다. 그가 이끌었던 필리핀 해방군은 1896년 11월 9일부터 11일까지 전개된 #카비테비나카얀전투 에서 #스페인#라몬블랑코총독부대 를 대파하는 첫 승을 거둔다.

에밀리오 아기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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