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오 아기날도
하지만 #보니파쇼 ( #AndresBonifacio , 1863-1897)가 1897년 5월 10일 분티스 산에서 총살당한다. 이후 스페인군에 밀려 도망 다니던 아기날도와 혁명정부는 #불라칸 의 비악-나-바토(Biak-na-Bato)에 숨어 1897년 11월 1일 헌법을 제정하고 비악-나-바토 공화국을 수립하며 아기날도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리베라총독 의 평화제의를 받아들인 아기날도는 1897년 12월 14일과 15일 양일간 만나 평화협정에 서명하고, 합의사항에 따라 홍콩으로 망명하면서 비악-나-바토 공화국은 막을 내린다. 그러나 스페인으로부터 전쟁피해 보상금인 170만 페소 중 60만 페소만을 받았고, 혁명전투 또한 계속되어 평화협정은 준수되지 않았다.
아기날도와 그 추종자들은 홍콩으로 추방되었다. 하지만 이 추방으로 독립운동이 끝이 난 것은 아니었다. 1898년 4월 25일 스페인과 미국 간 전투가 발발하자 홍콩에 있던 #듀이해군준장 이 #코레히도르섬 을 통해 #마닐라 만으로 들어와 스페인 해군을 대파했다. 듀이장군의 마닐라 만 전투 승리 후 아기날도와 혁명지도자들은 1898년 5월 19일 카비테로 돌아와 스페인과의 투쟁 재개를 선언한다.
1898년 6월 12일, 아기날도 정부는 수천 명의 시민이 참석한 가운데 #카비테 의 #카윗 에서 필리핀 독립을 선언했다. 아기날도 자택의 발코니에서 리안자레스 바우티스트가 자신이 직접 쓴 독립선언문을 낭독했으며 그날 아기날도는 최초로 필리핀 국기를 선보였고 필리핀 국가도 최초로 연주되었다.
필리핀 국기는 필리핀 외교관 펠리페 아콘실로의 아내인 마르셀라 아콘실이 홍콩에서 만들었으며, 필리핀 국가는 당시 카비테의 음악교사였던 훌리만 펠리페가 작곡했다. 1898년 8월 필리핀에 도착한 미군은 3만 명의 필리핀군이 14마일에 걸쳐 참호를 파고 마닐라를 포위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루손섬에서 아기날도가 이끄는 필리핀 해방군이 스페인인들을 몰아냈던 것이다. 필리핀군과 합류한 미군은 참호 조성 작업의 일부에 가담하였다.
배신의 서곡-미제국과 스페인의 동맹
이 무렵 미국과 스페인의 전쟁은 사실상 끝난 상태였다. 전쟁이 스페인의 패배로 결정이 나자, 스페인 잔류군은 미국과 비밀협상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미국과 가짜 전쟁을 하기로 몰래 약속했다. 필리핀인들은 미국과 함께 싸우려고 했으나 미국은 어떤 필리핀인들도 도시 안으로의 진입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스페인군은 어떤 필리핀인도 도시 안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조건으로 미국에 항복했기 때문이다. 필리핀인들은 도시 밖에서 도시를 포위한 채로 남겨지자 격노하였다. 미군은 필리핀인들을 향해 방어선을 만들었다. 아기날도는 평화 유지를 원했으나 미군 사령관 #오티스 (Elwell Otis)는 필리핀과의 어떠한 협상도 거부하였고, 미국과 필리핀군 사이엔 긴장이 흘렀다.
1898년 12월 10일, #파리조약 (Treaty of Paris)에 서명한 미국과 스페인은 필리핀·괌·푸에르토리코를 미국에 양도하고 쿠바의 독립을 인정하는 대가로 스페인에 2천만 불을 지불한다. 이 무렵 필리핀 혁명정부는 1899년 1월 21일 마닐라 북쪽에 위치한 말로로스(Malolos)에 모여 헌법을 공포하고, 이틀 후 아기날도가 신임 대통령에 취임한다.
그해 2월부터 혁명정부는 미국군과 무력전을 벌이면서 3년간에 걸쳐 끈질기게 저항했지만, 1901년 3월 아기날도가 체포되면서 항복하게 된다. 아기날도는 혁명군에 무기를 버리고 항복할 것을 명하였지만 혁명군의 무력항쟁은 1903년까지 계속되었다. 당시의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겠다.
파리조약 조인 몇 달 후 미국대통령 #맥킨리 는 “미국이 침략자나 정복자가 아닌 친구로서 왔다”며 자비로운 합병을 선언한다. 필리핀인들이 오랫동안 갈망해왔던 독립을 막겠다는 것이었다. 긴장이 높아가는 가운데 1899년 미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미국은 마닐라 점령 후 시(市)의 외곽선을 계속 새로 그려가면서 필리핀인들을 시 바깥으로 몰아냈다. 파리조약에 동의하지 않은 필리핀인들은 매우 화가 나 있었고, 미국의 행위는 필리핀인들에게 혼란과 격분을 불러일으켰다. 아기날도는 미군정 총독 오티스에게 평화를 요구하였으나 오티스는 ‘우리는 전쟁을 원한다.’고 험상궂게 말할 뿐이었다. 3시간 후 미군 포병대는 강력한 포격을 실시했고 5천 명의 미군이 필리핀군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하루 만에 3천 명의 필리핀군이 죽었다.
수백 명의 필리핀인들이 파시그(Pasig)강을 헤엄치다 죽었는데 한 미국병사가 이를 다음과 같이 지꺼렸다. "깜둥이를 물속에 빠뜨리는 것은 칠면조 쏘기보다 더 재밌었다" 미군은 단지 6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을 뿐이다. 2월 5일의 전투는 미국인들에게 야훼의 계시였다. 그들은 이 #잡종 ( #雜種 ) 무리들이 첫 번째 발포에 달아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계속 말했다. “이 첫 번째 포격이 있던 장소에 내가 있었던 것은 나의 행운이다. 미군은 그때까지도 대포를 검사하는 중이었다. 우리들의 포병대는 그러고 나서 적에게 강력한 포격을 시작하였다. 이후 테네시와 네브라스카 연대는 그들을 몰아낼 수 있었다.” 파리협정은 곧 의회에서 비준되었고 공식적으로 #필리핀은미국의소유임이선포 됐다.
미국이 숨기고 싶어하는 전쟁4 (0) | 2022.05.29 |
---|---|
미국이 숨기고 싶어하는 전쟁 3 (0) | 2022.05.29 |
미국이 숨기고 싶어하는 전쟁1 (0) | 2022.05.28 |
또 하나의 백제 , 위구태 백제는 요동서 나와 (0) | 2022.04.26 |
세월호에 항상 진심이었던 이재명 (0) | 2022.04.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