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들에 의한 타이타이 학살 때 자신들이 불태운 성당의 종들을 전리품이라며 앞에 놓고 찍은 기념사진.
이 종들 중 하나는 이 전투에 참가한 #미2사단 인 #한국의정부주둔미군부대 안에 전시되어 있다.
이 종을 돌려 달라는 필리핀 의회의 결의와 요청에도 반환하지 않고 계속 전시하고 있다.
최근 필리핀 국회의원들이 100여 년 전 미국이 필리핀을 점령하던 기간 동안에 필리핀 중부 #사마르 주의 한 가톨릭 성당에서 가져간 교회 종 3개의 반환을 미국 정부에 요구했다. 테오도로 카시노, 네리 콜메나레스, 벤 에바르도네 등 국회의원 3인은 미국이 필리핀-미국 전쟁 동안 저지른 “역사적 죄악을 바로 잡기 위해” 미국이 종교 예술품들을 반환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 #발랑기가종 ’은 1901년 미군이 사마르 섬의 #발랑기가 (Balanggiga)마을에서 탈취해 간 것이다.
1901년 8월 11일, 9연대의 C중대는 사마르의 발랑기가 마을로 향했다. 이 군대는 코넬(Thomas W. Connell)이 지휘했는데 이 자는 에이레계 가톨릭교도로 마을을 가톨릭식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는 이 목적을 위해 원주민을 고용했고 이중에 룩반(Vicente Lukbán 1860-1916)이라는 병사도 포함됐다.
9월 26일 밤 옷을 잔뜩 껴입은 여자들이 마을의 교회로 조그만 관을 운반하는 것이 목격되었다. 미군이 관을 열자 관에는 콜레라로 죽은 아이들이 나왔다. 하지만 관에는 칼들이 숨겨져 있었고 많은 여자들이 실제로는 남자였다.
다음날 아침 지휘자 페드로 산체스가 한 보초와 이야기를 나눈 뒤 총성이 울렸다. 이를 신호로 교회에 숨어 있던 병사들이 칼과 도끼 그리고 삽으로 미군을 향해 일제히 공격을 했다. 미군은 코넬의 명령에 따라 보초와 장교들만이 무장하고 있어서 단체로 식사를 하던 많은 미군들이 죽었다.
미군들은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코넬은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죽었다. 브레튼이 지휘하는 그룹이 간신히 무기를 확보하였고 그들은 즉시 필리핀인들 250명을 사살하였다. 미군의 경우, C중대원 중 59명이 죽었고 23명이 부상하여 6명만이 무사하였다.
생존자들이 바세이에 도착하자 북밀러(Bookmiller) 중령은 55명의 자원자와 함께 복수를 다짐한다. 그리고 마을과 해안근처의 필리핀인들을 모두 사살했다. 그들은 마을에서 동료들의 시체가 난도질당한 것을 보았거나 승리를 축하했던 필리핀인들을 사로잡았다. 그들은 스스로 땅을 파야했고 미군은 그들을 모두 매장했다. 나머지 필리핀인들의 시체는 모두 모아서 불태웠고 마을을 아예 없애버렸다.
이 사건은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매우 격앙된 미군들은 이후 전법을 #초토화전 과 #대규모학살전 으로 바꾼다. 이리하여 이후 일상적으로 민간인을 학살하게 되었다.
채피(Chaffee)장군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잔인한 수단들을 모두 승인했고 잔인성은 이후 전쟁에서 더욱 확대되었다. 10월에 세부 섬이 항복하였고 12월엔 바홀 섬이 함락되었다. 1902년 룩반(Lukban)이 사로잡혔고 사마르 섬의 항쟁은 끝이 났다.
루손 섬의 전쟁이 끝나갈 때 프랭클린 밴은 악명 높은 작전을 실행하였다. 모든 시민들은 특정 도시로 소집되었고 이 #도시들은교도소가되었다 . 그리고 이 지역밖에 있는 모든 마을과 집들을 부수기 시작하였다. 4월 16일 말바르 섬이 함락되었고 7월 4일 프랭클린은 전쟁 종결을 선언한다. 그러나 이 전쟁 중 엄청나게 많은 잔학행위가 일어났다는 사실이 문제가 되었다.
#바탕가스대학살 (batangns massacre)
1901년 바탕가스는 저항이 지속되는 최후의 지역 중 하나였다. 사무엘 서머장군은 남루손의 1지역의 반란군을 진압하고 있었지만 속도가 너무 느렸다. 그러자 1901년 11월 30일 벨(Franklin J. Bell)로 지휘관이 교체되었다. 벨은 비교적 서머보다 덜 잔인했으나 벨도 북 루손에서 잔학함을 과시한 인물이다.
벨은 자신이 북루손에서 한 것과 같은 방법을 이용했다. 12월 8일 벨은 필리핀인을 보호한다는 구실을 만든 후 몇몇 마을을 선택하여 그곳에 모든 주민을 이동시켰다. 그리고 죽음의 선을 그려놓고 이 선 바깥에 존재하는 사람은 그 누구든 죽여 버렸다. 사람·집·동물·가게·배·농작물 등을 모조리 태워버려 민간인들의 저항의지를 꺾어버리고 저항세력의 공급을 차단했다. 1902년 1월부터 4월까지 4000명의 미군들이 이 존(ZONE)의 바깥을 경비 하였고 다른 반쪽이 그 외 지역을 초토화시켰다.
이 기간 중 8,350명의 필리핀인이 존에서 사망했다. 조그만 지역에 사람들을 모아놓다 보니 위생이 엉망이 되었고 식량부족으로 사망자들이 또 발생했다.캠프는 길이가 2마일 폭이 1마일이었는데 여기에 8천명의 필리핀이 살았고, #한건물에이백명이살기도하였다 . 로보와 산 주안의 캠프는 20%가 몰살당하기도 했다.
"정말 웃기는 것은 깜둥이들이 우글거리는 이 작은 지역은 바깥에 죽음의 선을 가진 우리였고 이 선 바깥에 있는 살아있는 모든 것은 죽임을 당했다. 도착했을 때 난 천연두환자를 30명을 발견하였고 매일 5명의 환자가 발생했는데 대부분 죽음 직전이었다. 밤이 되면 흡혈박쥐들이 시체들에서 잔치를 벌이고 모기들이 바쁘게 돌아다녔다.
이 시체들의 악취는 곳곳에 흘러 다녔고 이는 사랑스런 지배의 평판을 약간 불편하게 하였다." (Commander of one of Bell's concentration camps)이 존(지역)에서의 사망은 질병과 기아에 의한 것만은 아니었다. 양민들은 항상 처형의 위협 속에 있었다. 미국인 사망자가 생긴다거나 필리핀인들이 조금 다른 일을 한다싶으면 죽여 버렸다.
1902년 봄 한 미국인 병사는 1300명의 양민학살을 묘사하였다. 편지에 따르면 한 필리핀 성직자가 고해성사를 하였는데, 미군은 신도들 앞에서 그 성직자를 교수형으로 처형했다.또 몇 주 동안 20명씩 묶여서 양민들은 그들의 대규모 묘지를 팠고 처형되었다. 필자에 따르면 식량이 부족해서 그렇게 양민학살을 하는 것이 필리핀인들에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게 학살의 모든 이유였다. 미국인이 죽으면 무작위로 양민들을 추출해서 죽여 버렸다. 잘살거나 영향력이 있는 필리핀인은 독방에서 특별히 나쁜 취급을 받았다. 그들은 작은방에 한명씩 투옥되었고, 미국에 복종을 맹세할 때까지 갱을 불러 그들의 집을 부쉈다. 벨 장군에 따르면 이런 건 전쟁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며 죄없는 사람들도 이 범죄들로 인해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바탕가에서 얼마나 죽었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대개 10만 명 정도로 추정한다. 이 학살전을 수행한 벨 장군은 전 인구의 1/6을 죽였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벨 장군은 다른 제국주의 국가라도 이런 가혹한 처사를 단행하였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수용소는 1902년 4월 16일 말바르의 항복으로 폐쇄되었지만 부작용은 오래갔다. 태프트에게 보내진 편지에 1896년에서 1905년과의 비교에 대한 조사가 적혀있다. 발라양이란 마을에서 1896년 41,308명의 인구가 있었는데 1905년엔 인구가 13,924명으로 줄었다. 소의 숫자는 3,680마리에서 80마리로 줄었다. 10만 마리의 닭은 5,000마리로 줄었다. 이 바탕가존 사건은 미국의 잔학성 중에서도 최악이었다. "유타에서 토끼를 잡으면 토끼들은 달아나기만 하였으나 필리핀의 폭도들은 그러지 않았다."(Fred D. Sweet, of the Utah Light Battery)
문재인도 뭉갠 세월호 진실, 외국언론이 보도 (0) | 2022.06.06 |
---|---|
미국이 숨기고 싶어하는 전쟁6 (0) | 2022.05.29 |
미국이 숨기고 싶어하는 전쟁4 (0) | 2022.05.29 |
미국이 숨기고 싶어하는 전쟁 3 (0) | 2022.05.29 |
미국이 숨기고 싶어하는 전쟁2 (0) | 2022.05.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