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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숨기고 싶어하는 전쟁6

역사는삶의보고다

by 좀지나가자 2022. 5. 29.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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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들에 의한 타이타이 학살 때 자신들이 불태운 성당의 종들을 전리품이라며 앞에 놓고 찍은 기념사진.

이 종들 중 하나는 이 전투에 참가한 미2사단인 한국 의정부 주둔 미군 부대 안에 전시되어 있다.

이 종을 돌려 달라는 필리핀 의회의 결의와 요청에도 반환하지 않고 계속 전시하고 있다.

#10살이상은모조리죽여라

미군지휘관 중 특히 스미스(Jacob Hurd Smith 1840-1918) 준장이 악명 높았다. 그는 “열 살 이상은 모조리 죽여라( #KILLEVERYONEOVERTEN )”라는 명령을 내리고 “ #나는포로를원치않는다 . 나는 너희들이 죽이고 불태우기를 원한다. 더 많이 죽이고 불태울수록 더 기쁠 것이다.” 라면서 학살을 명령하였다. 그 뒤에 문제가 되자 미군은 그를 군법회의에 회부했지만 구두경고와 전역이외에는 어떤 처벌도 하지 않았다.

스미스는 재판 도중 자신의 학살명령을 모두 인정했으며 그것이 전쟁 중에 필요한 것이었다면서 오히려 자신의 행위를 자랑했다. 제국주의 신문들조차도 그의 잔혹행위를 비난하였으나 #법정은그를무죄로판결한다 .

그리고 그는 샌프란시스코에 전쟁영웅으로 금의환향하나 군대에서는 퇴역해야 했다. 그밖에도 많은 학살혐의자들이 기소되나 모두 무죄 방면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작전의 최종 지휘자이며 작전입안자인 채피(Chaffee)는 기소되지도 않았다. 이로서 전쟁 중의 모든 잔학행위는 면죄부가 주어졌다. 이후에도 미군은 #민다나오섬#졸로섬 에서 #모로족 과 11년간 더 전쟁을 하게 되지만 이후 필리핀은 점차 미국화 되어 간다.

매킨리의 망언-필리핀 침략은 신(야훼)의 뜻이었다.

모든 미국인들이 필리핀전쟁을 찬성하는 것은 아니었다. 반제국주의자들은 작은 그룹이었으나 많은 활동을 했다. 그들이 주장한 필리핀합병에 대한 반대이유는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이상에 대한 믿음과 미국을 소수민족들이 더욱 더럽힐지도 모른다는 우려 등 여러 가지였다.

1900년 당시 ‘반제국주의자 동맹’의 부회장이었던 마크 트웨인(본명 Samuel Langhorne Clemens 1835-1910)은 “미국이 필리핀을 해방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필리핀의) 정복을 목적으로 전쟁을 벌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반(反)제국주의자다. 나는 침략전쟁을 벌이는 것에 단호히 반대한다. …미국의 우수한 젊은이들이 더럽혀진 깃발(성조기) 아래 불명예스러운 총사(銃士. 총잡이)로 전락하여 다른 나라로 보내지는 것에 강한 불쾌감이 든다.” 라고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태를 비난했다.

트웨인 외 철강 왕 #앤드류카네기 그리고 스탠포드 대학총장인 데이비드 S. 조단 등의 지식인들과 사회지도층 인사들도 필리핀의 미국에 합병시키자는 의견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합병 반대론자들은 필리핀 합병이 미국의 민주주의를 손상시키는 처사이며 필리핀을 병합한다는 것은 각국의 민족자결권을 무시하는 것이며 먼로 독트린과 제퍼슨이 제정한 미국 민주주의 이념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강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이들의 소리는 무시되었다. 합병 찬성론자들은 그들의 선조인 청교도들이 처음 신대륙에 진출해서 인디언들을 교화시키려했으나 무지몽매한 그들이 반대했다고 해서 청교도들이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부유한 국가가 되었음을 상기시켰다.

또한 그렇게 반항했던 인디언들도 미국에 복종하고 미국의 법을 따르게 되었으므로 필리핀도 인디언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민주주의를 가르치고 야만적인 필리핀 사람들을 문명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오히려 다수의 의견으로 대두하였다.

필리핀 침략과 지배를 둘러싼 논쟁에 대한 월리엄 매킨리 대통령의 답변은 경악과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한다. 그는 백악관을 방문한 각료들에게 필리핀 합병을 결정하게 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고 한다.

"그는 신에게 간청 기도를 하던 중에 그 섬들을 모두 흡수한 후 필리핀 사람들을 교육하여 문명화하고 기독교화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으며, 그런 연후에야 비로소 잠자리에 들어 단잠을 이룰 수 있었다라고 했다." 필리핀 침략은 신(야훼)의 뜻이었다는 주장이다.

매킨리 암살 후 대통령이 된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기도 했다. “어떤 전쟁이든 대환영이다. 우리나라는 전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897년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해군차관으로 임명되면서 한 말이다. 루스벨트의 말 이후 그 이듬해 스페인과 전쟁이 일어났으며 미국-스페인 전쟁 종전 즉시 필리핀-미국 전쟁이 일어났으니 미국의 최고위직이 원하는 바대로 역사는 전개된 셈이다.

#전쟁은미국의해외정책에주요한전환점이되었다 . 아직 국가는 고립주의를 요구하였지만 미국의 영향력은 모든 아시아에 확장되고 있었다. 미국에게 필리핀은 중국으로의 문을 열었고 엄청난 경제적인 기회를 제공했다. 이는 제국주의일본이 역시 중국으로 확장하려고 했기 때문에 일본과 미국의 경쟁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수십년후필리핀의섬들은제2차세계대전중미군의중요한요충지가된다 .

민간인 학살

미국은 필리핀을 점령해야 할 아무런 권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곳에서의 행동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미국은 자유를 원하는 필리핀 군인과 양민들을 학살하였다. 미국은 필리핀인들과의 협상도 거절하고, 오로지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굴복만을 요구했다.

필리핀에서 미군이 저지른 만행은 1900년 12월 #아서맥아더장군 이 현지 미군에게 하달한 내부지침서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문서에 따르면 “ #필리핀인에게는전쟁규칙을준수할필요가없다 .”고 되어있다.

필리핀 독립전쟁 기간 중인 1898년에서 1913년까지의 희생자 수는 필리핀 독립군 약 2만 명, 민간인 20만 명에서 150만 여명으로 알려져 있다. 민간인 학살의 경우 편차가 큰 것은 그만큼 사건의 진실이 은폐되고 왜곡된 증거의 방증이기도 하다.

그러면 미군 희생자 수는 어느 정도 될까? 대략 5천 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는데, 미군 사망자는 전쟁보다 질병으로 인한 것이 더욱 많았다. #말라리아#풍토병#필리핀군보다더욱무서운적이었던셈 이다. 필리핀 독립전쟁 시기에 미군들이 필리핀인들을 어떻게 학살했는가를 당시 참전했던 미군들의 증언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① F. A. Blake, of California, in charge of the Red Cross

"나는 그런 처형을 본적이 없다. 그리고 다시는 그 광경을 보고 싶지도 않다. 우리는 지나친 모든 지역에서 부상자에게 붕대를 감아주어야 했는데 다리나 팔은 거의 다 부서져 있었다. 목 자르기, 가슴이나 배의 무서운 상처들…보이는 곳마다 미군들이 원주민을 죽이고 있었다. 필리핀인들은 그들의 땅에서 영웅적으로 버텼으나 잘 훈련되고 사기 높은 미군의 강력한 화력 앞에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었다. 나는 한 조그만 들판에서 79명의 시체를 셀 수 있었고 강의 반대편에도 시체가 곳곳에 가슴높이까지 쌓여 있었다."

② A private of Company H of the First Regiment,

Washington State Volunteers

"곧 우리는 진격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우리는 참호에서 나아가 허리까지 차오르는 진흙탕 물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는 끓어오르는 피로 그런 것 따위 신경을 쓰지 않았고 우리는 모두 깜둥이들을 죽이길 바랬다. 사수들에게 이는 화끈한 게임이었고 토끼를 조각조각 내듯이 사냥하였다. 다시 곧 그들에게 돌격하는데 그런 학살은 아마 본적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수백? 아니 수천의 그들을 토끼처럼 사냥하였다. 우리 모두 미쳤다. 전쟁이 끝나면 정말 엄청날 것이다. 하지만 이건 전쟁이다. 우리는 곧 전쟁터를 돌아다니면서 아직 살아있는 그 모두를 죽였다. 죄수는 없다. 그들이 우리를 괴롭혔으므로 우리는 부상자와 그 모두를 죽일 것이다."

③ A Corporal in the California Regiment

"우리는 낮에 잠을 자고 밤에 임무를 수행했는데 거리를 순찰하였다. 7시까지 모든 사람은 집에 들어가야만 하고 사람을 말하면 단지 한번을 경고하였다. 거부하면 즉각 사살하였다. 우리는 첫날 300명이상을 죽였다. 그들이 공격하려 하면 우리는 집을 불태우고 근처의 모든 집을 태웠고 원주민은 사살하였다. 그러니까 마을은 현재 매우 조용하다."

④ A. A. Barnes, Battery G., Third United States Artillery

"Titatia마을은 며칠 전 우리에게 항복했고 2개의 중대가 점령중이다. 지난밤 중대원중 하나가 위장이 잘린 채로 발견되었다. 즉각 휘튼장군은 마을을 없애고 모든 사람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명령은 즉각 시행되어 천 명 가량의 남자와 여자 그리고 어린이들이 죽었다. 나는 강한 마음을 지니게 되었고 영광 속에서 검은 피부를 한 자들에게 포격할 수 있었다"

⑤ Sergeant Will A. Rule, Co. H, Colorado Volunteers

"5내지 6개의 블록에 4-5백 명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여자나 아이들은 나오게 한 후 집에다 불을 지른다. 달아나려 하는 깜둥이들은 쏴 죽인다. 이게 필리핀식 전쟁이다."

⑥ Leonard F. Adams, of Ozark, in the Washington Regiment"

테네시 친구들이 얼마나 많은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이들을 죽였는지 난 모르겠다. 그들은 포로를 잡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테네시의 한 중대는 본부에 30명의 포로를 보냈는데 본부엔 백 마리의 닭이 있었고 포로는 한 명도 없었다." 사로잡힌 자들에게 행운은 없었다. 이들에게는 General Order 100이 적용되었다.

이 일반명령 100은 남북전쟁 때 만들어진 것으로 민간인인척 하거나 전쟁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게릴라전을 하는 자들을 즉각 처형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사로잡힌 자들은 보복 등으로 항상 처형될 처지에 놓였다. 한 예로 대위 콜러가 필리핀의 덫에 걸려 도끼질을 당하자 훈스턴 대령은 24명의 필리핀 포로를 처형하였다.

불타고 있는 필리핀 원주민의 집

필리핀의 미국과의 독립전쟁 기간 중인 1901년 11월 9일 미군의 방 화에 의해 타고 있는 필리핀 민가의 모습

반면 필리핀인들은 미국포로를 비교적 편하게 대우했다. 그들은 잘 먹었고 필리핀군대에 여러 가지 요구를 하였다. 1899년 아기날도는 미국의 언론인들을 초청하고 미군포로들의 상태를 보게 했다.

그들은 미군포로들이 죄수라기보다 손님으로 다루어지는 것을 확인했다. 몇 명의 포로를 석방하면서 아기날도는 포로를 정당하게 대우한다는 것을 직접 증명했다. 아기날도가 체포된 후 필리핀인들은 더 이상 포로들을 잡으려 하지 않았다. 사실은 그럴 기회가 거의 없었다.

필리핀 사람들을 #스페인의압제로부터독립된민주국가로만들어주겠다던미국의약속은이행하는데무려50년이걸렸다 . 미군은 투항한 필리핀 독립군을 포로로 대우하지 않았고 살인자라는 이름을 붙여 모두 처형시켰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필리핀 사람들이 처절한 저항과 극렬한 게릴라전을 통해 미국의 통치에 반대하지 않았다면, 미국은 과연 필리핀을 독립시켜 주었을까? 아무튼 미국이 필리핀을 식민지화하려는 야욕이 없었다고 믿는 독자들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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